백두대간산행기

[스크랩] 백두대간 19구간 지기재->화령재

터보식스 2008. 9. 8. 14:53

백두대간 19구간 지기재->화령재

산행일자:2002년 3월 3일, (한등 888차)

해짐 : 18:23 해뜸 : 07:09 회원 53 명 대장:

산 행 소 요 시 간 (김신인 기록)

목적지

도착

출발

참고사항

시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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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버스 2대

지기재

11:30

11:40

날씨 좋음, 전망좋고, 등산로 평탄

신의터재(280M)

12:40

13:00

점심, 오랜만에 53명이 모두 한자리에서 식사를 했음.

윤지미산(538M)

16:00

16:10

추워서 10분을 못 있겠음

화령재(320M)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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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완주, 선두 16:00도착,

 

나에게 딱 맞는 산행 작성자 : 김 신 인

등산로 평탄, 거칠 것 없이 선두는 달린다. 속도가 최고로 난다. 심이사 말로 140Km/시 달린다나. 이것도 한 시간 점심은 오랜만에 53명 전원이 신의태재에 한자리에서 점심을 했다. 참 오랜 만이다. 날씨도 양호 선두는 마음껏 달린다. 모두 완주 특히 양 사장님은 몸에 기계를 차고서 나보다 먼저 완주 했다.

지도에 나와 있는 시간을 나를 목표로 했나? 후반에는 천천히 시간을 조절 했다. 내 시간이 산행 끝나는 시간이다. 언제나 후미를 면하나?

 

역사속의 현장 윤지미산 작성자: 천 호 열

집사람과 함께

오늘 3월3일 吉日인지 고속도로 휴게소는 결혼화객들을 실은 버스들로 많이 붐벼 복잡하였고, 도로는 차가 제법 밀려 지기재에 11시34분 도착한다.

11시40분 지기재에서 지기동 마을 입구에 있는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성진항의 묘비”와 금강, 낙동강 분수령 표지판을 세워 놓은 것을 확인하고 마을 진입로 시멘트 길에서 마을 못 미쳐 오른쪽 표시기를 따라 진행한다. 산행로는 고도차가 크게 없어 표시기가 길 요소마다 잘 걸려 있어 길을 찾는데 큰 무리 없이 걸어 금은골 마을 뒷산에 이른다.

12시00분 암릉 길을 따라 잠시 오르막을 오른다. 암릉길 못 미쳐 산세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간 길은 큰 어려움 없이 계속 진행하여 암릉으로 올라선지 10분후에 논둑길을 따라 걷는다.

12시10분 잠시 임도를 지나 다시 숲길로 접어 들어 20분 정도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가니 고압 송전탑이(12시30분) 나타났으며, 고압 송전탑은 계속하여 연결되어 줄을 잇고 있었다. 송전탑을 지나 나무를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곳을 지나 5분후인 12시35분 신의터재(해발280m)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 출발하자마자 모두들 걸음을 빨리 걷다 보니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곳 신의터재는 상주시 화동면과 내서면을 연결하고 상주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신의터재 해발 280m라고 적어 놓은 대형 돌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돌비석 뒤에는 신의터재의 내력이 “임난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리었고 임난 때 의사 김준신(金俊信)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月 二五日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고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로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五十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 져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친다. 1996년 12월 상주시장” 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그 옆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준신씨의 공을 기리는 유적비인 “의사 절곡 김선생 준신 유적비(義士 節谷 金先生 俊臣 遺蹟碑)”가 서 있으며, 낙동강 과 금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표지판도 그 옆에 보인다.

12시40분 신의터재를 올라서니 묘지군을 볼 수 있다. 10미터 정도 전진하여 다시 우측 숲길 능선으로 접어드니 왼쪽편의 마을이 눈에 들어 온다. 이제부터 방향을 동쪽으로 잡아 가다 보니 10분후 329.6m의 삼각점을 확인하며 지나자 3분후 무덤 몇기가 나타난다. 아직까지 야산인 곳이라 고도를 느끼지 못하고 임도와 가지런히 정돈된 전나무 숲 군락 지들을 지나 13시00분 동네 밭 바로 옆을 지나 10분후 선교리 장안 초등교 쪽으로 내려서는 길과 장자골쪽으로 내려서는 사거리 갈림길을 지나 13시15분 밭 가장자리로 길이 잘 나 있는 곳으로 내려서서 점심식사를 하고 13시30분 출발한다.

약간의 오르막을 올라서 13시37분 왼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지점을 지나게 되며, 오른쪽 편에 조그만 봉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13시45분 북으로 꺽이는 지점을 지나 사거리 소로길이 나타나고 곧 이어 4분후 소로길이 한 번 더 나타난다. 다시 오르막에 올라서 14시00분 무지개산(437.8m) 직전에서 왼쪽인 서쪽 방향으로 선회한다. 무지개산 정상에 가지 않고 모두들 그냥 왼쪽 사면 길 따라 걸어간다.

평지 길을 부지런히 걸어간다. 산길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한결 걷기가 수월하였고 14시07분 사거리 안부를 지나 오르막길을 잠시 올라서 걷다 8분후 다시 사거리 안부를 지나고 나서 묘2기 앞의 돌비석이 두개를 세워 놓은 곳을 지나니 잠시 숨을 헐떡거리게 하는 오르막에 올라서 능선을 따라 걸으니 14시23분경 능선 오른쪽편의 저수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또 그 뒤편에는 내서면 25번 국도인 듯한 도로가 보인다.

대간의 고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유난히 묘지도 많고 소로가 잘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4시35분 사거리 길을 지나니 묘지 비석을 한글로 깨끗하게 “학생 계령 강공 재범의묘” 라고 적어 놓은 곳을 지나고 5분후 능선 왼쪽편의 판곡저수지가 보이고 전나무 숲 군락이 자주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4시55분 오르막길을 잠시 숨을 헐떡이게 하며 올라선 능선 길을 따라가다 보니 능선 끝의 윤지미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능선 오른쪽편의 25번 국도와 왼쪽 판곡 저수지와 마을이 보이는 것을 확인하며 15시10분 윤지미산(538m) 정상에 도착한다.

윤지미산 정상은 표지기만 빽빽하게 붙여 놓았고, 바위돌이 몇 개가 있는 것과 바위 너머 저 멀리 학교 건물을 볼 수 있었으며,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으나 조망은 별로였다. 윤지미의 이름은 좀 특이하여 모두들 김지미로 불러보신다.

윤지미산을 내려서는 경사가 제법 급한 길을 지나 10분정도 지나 무덤 2기를 지나 곧 사거리 안부를 지난다. 15시30분 밭 옆의 작은 임도가 나타나고 다시 10분후에 차량이 통행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한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따라 100M 정도 진행하니 다시 숲길로 접어들게 되고 숲길을 따라 걷다보니 14시45분 숲 속 길에 삼각점을 하나 발견한다.“045”를 표시한 삼각점을 지나 3분후 도로 정비를 하기 위한 표시 막대기를 확인하고 8분후 측량봉을 세워 놓은 곳을(CP45-1) 지나 차량 소리가 가까이 들려옴을 느끼며 내려서는 곳이 화령재(320m)이다. (16시00분)

화령재 아스팔트길에 내려서기 전 백두대간 길이 달라짐을 알리는 조그만 나무 표지판을 달아 놓은 것을 확인한다. 표지판은 서용희(011-332-3365)라는 사람이 매직으로 적어 놓은 것으로 왼쪽 아래쪽으로 연결 구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16시00분 화령재에 도착하니 화령재 해발 320m라고 적어 놓은 대형 표지석과 대령정(大嶺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었고 직진하면 청주, 보은으로 가는 25번 국도와 우회전하면 괴산,화북, 문장대로 가는 49번 지방도를 표시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고 낙동강, 금강 분수령 표지판도 세워져 있었으며 저 멀리에는 우리가 다음에 가야할 봉황산이 보였다.

화령재 해발 320m 표지석 뒤에 적어 놓은 글을 여기에 적어 본다.

“화서연혁(化西沿革)

이 고개는 小白山脈의 줄기를 타고 北으로 鳥嶺, 南으로 秋風嶺과 연하여 화령으로 불리어 왔다고 택리지(擇里誌)에 기록 되어 있다.

化寧은 본래 신라 때는 건비군(建匕郡)이었으나 경덕왕때 화령군으로 고쳤고 (화령이란 지명은 火嶺의 고개 이름에서 緣由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때는 懸으로 되었다가 근대에 와서 化西面으로 되었다. 예부터 化寧市場은 상주장, 관기장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으며 六,二五때는 국군이 인민군 15사단을 섬멸한 전승지로 이름 있는 곳이며 남으로 황간(黃澗) 북으로는 화북 문장대에 이르는 지방도가 있고 상주-보은간 국도가 동서로 관통하여 교통의 요충지이다. 서기 1987년 8월 일 건립“ 이라고 씌여 있다.

이 구간은 산행하기에 대간답지 않게 고도가 얕은 구간으로 원래 계획하였던 산행 소요시간이 5시간55분이었으나 4시간20분만에 완주하였다. 그냥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산행 중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기차소리, 개 짖는 소리, 확성기 소리들이 마을과 가까이 하였음을 말해 주는 구간이었다. 유난히 묘지도 많았고 또한 밭도 많이 지나쳤고 산은 산다운 산을 지나지 못하는 아쉬운 구간이었으나 역사의 현장을 표시하여 놓은 곳이 많아 다른 구간과는 의미가 틀리는 것 같았으며 산행은 다른 정맥 구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출처 : 한국등산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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